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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100선
099 새 예루살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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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2, 18-21, 22:1-2
정사각형의 성
 
스물아홉째 항목은 그 성이 하나의 큰 사각형이라는 것이다. 계시록 21장 16절은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고 말한다. 그 성의 척량은 세 치수가 같은데 각 치수가 일천 스다디온의 열두 배이다. 그 성이 완전한 네모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교회 생활에 조금도 기울어진 것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배워야 한다. 모든 것이 곧고 반듯해야 한다.
 
사탄의 상징인 뱀에 대하여 보면, 그것은 어떤 것도 곧고 반듯한 것이 없다. 그것의 모든 부분은 교활하고 구부러졌다. 많은 때 주 안에 있는 형제들이 우리를 뱀이 되도록 가르치고자 우리들에게 왔었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 곧고 너무 열리고 너무 솔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조금 ‘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당신은 우리에게 현명하게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와 같이 교활하게 되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결코 법정에 선 변호사나 유엔의 외교관들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스런 그리스도인 형제들이다. 우리는 반드시 할 수 있는 한 곧게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마지막 한 주일 동안 주 예수님은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과 마주 대했다. 그들은 그분이 하셨던 것 같은 그러한 행동을 할 권위를 누가 그분께 주었는지 주님께 물었다. 주님은 이 사람들에게 즉시 대답하지 않고,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마 21:24-25)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정치적인 회의를 열어서 주 예수께 “우리는 알지 못하노라”고 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알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나도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들(마 21:2327)에서 흠정역은 적절하게 번역하지 못했다. 흠정역에서 “우리가 말할 수 없다”라고 번역된 것의 헬라어 원문의 의미는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이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주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구부러졌으나, 주님은 곧으셨다.


투명한 성
 
서른째 항목은 새 예루살렘이 완전히 투명하다는 것이다(계 21:18, 21). 이것은 거기에 아무것도 불투명한 것이나 감춰진 것이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 모든 것이 깨끗하고 순수해야 할 뿐 아니라 수정같이 투명해야 한다. 거기에 아무것도 덮인 것이나 감춰진 것이 없어야 한다. 이 분야를 배우는 데는 많은 참된 공과들이 있다.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점검되고, 곧게 되고, 정결케 되고, 투명해져야만 한다. 우리 가운데 있는 교활하게 감춰진 어떤 것은 대적에 속하고, 뱀에 속하고 어두움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작은 문제를 하루나 이틀, 심지어 이십 일 동안 감출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심지어 어떤 것을 이십 개월이나 아마 십 년 동안 감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십일 년째의 첫 날에 그것은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것을 영원히 감출 수 없다. 교회 생활에서 모든 것이 분명하고 투명하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성
 
이 성은 그렇게도 곧고 투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다(계 21:11, 23).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 성의 내용이다. 그 이유는 그 성이 그분의 영광으로 완전히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성이 하나님을 담고 표현하는 그릇임을 의미한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보통의 탁상용 램프를 생각해 보자. 전형적인 램프에는 전등갓이라 불리는 바깥 덮개가 있고, 전등 속에는 빛의 충만이 있다. 램프는 빛을 표현하고, 빛은 램프와 갓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나타남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성에서 나타나신다. 오늘날 정상적인 교회 생활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다.


숫자 12
 
다음으로, 숫자 12가 이 성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사용된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전기를 예로 들어 사용할 수 있다. 전기를 이해하기란 극히 어렵다. 우리는 연구를 위해 이것을 조금 떼어다가 우리 손 위에 놓을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전기의 어떤 방면들을 대표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성에서 사용된 숫자는 그 성과 오늘날 교회 생활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숫자 12는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최소한 열 번 사용되었다. 열두 천사들과 함께 열두 문이 있고, 이 문들은 열두 지파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그다음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 열두 기초석이 있다. 열두 문은 열두 진주이고, 열두 기초석은 열두 보석이다. 그 성은 삼차원으로 되어 있고, 각 치수는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다. 그 성벽의 척량은 144규빗인데, 144는 12의 열두 배이다. 이것에 더해 생명나무는 성안에서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다.
 
숫자 12를 구성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이 두 장의 기록에 따르면, 3의 네 배, 또는 4의 세 배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아는가? 그 성의 네 방향에 각각 세 개의 문이 있기 때문이다. 3은 삼일 하나님의 숫자이고, 4는 피조물 혹은 창조의 숫자임을 기억하라. 계시록 앞 장에서는 숫자 7이 자주 언급된다. 일곱 교회들, 일곱 촛대들, 일곱 별들, 일곱 인들, 일곱 나팔들, 일곱 대접들이 있다. 이 숫자는 3 더하기 4나 4 더하기 3으로 이루어진다. 계시록은 숫자 7로 시작해서 숫자 12로 끝맺는다. 시작에는 네 생물 더하기 삼일 하나님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곱셈으로부터 나온다. 덧셈은 함께 더해지는 것을 상징하는 반면 곱셈은 함께 연합됨을 상징한다. 먼저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에게 더해진 하나님을 갖는다. 그런 다음 거듭남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곱해진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렇게 연합되어야 한다. 새 예루살렘 온 성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온 성이 숫자 12에 의해 대표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교회 생활은 숫자 7로 시작해서 숫자 12로 성숙된다. 이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교회는 인성에 더해진 신성으로 시작해야 하고, 그 후 각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되어야만 한다. 7은 12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교회 생활에서 거쳐야 할 길이다. 교회 생활의 성숙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내가 교회 생활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나 자신의 연합을 포함해야 한다. 무엇을 하기 전에는 나는 “내가 이것을 단지 스스로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하는가?”라고 점검해야 한다. 숫자 4 자체는 좋지 않다. 6은 더 나쁜 수이다. 우리는 최소한 하나님께서 사람과 더해지신 7과 같거나, 부활인 8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숫자 12의 실재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 가운데 있어야 한다.


기초
 
다음으로 우리는 그 성의 기초에 이르는데 여기서 여섯 방면을 다룰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건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선지자가 없다. 우리는 에베소서가 쓰일 때 어떤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선지자가 필요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때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다. 선지자들은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사도들은 영원히 거한다. 왜냐하면 그 성의 열두 기초석 위에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계 21:14). 사도들은 여섯 가지를 대표하기 때문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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