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ID/PW찾기
진리100선
성경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
왕국
새예루살렘
성경 난제
생명
봉사
성격
연회원이 되시면
진리와 생명 > 진리100선 > 새 예루살렘 3
진리100선
099 새 예루살렘 3
1page 2page 3page 4page 5page 6page 7page 8page 9page
계 21:2, 18-21, 22:1-2
- 열두 가지의 다양성
 
그 성의 열두 기초석은 열두 종류의 보석들로 이루어져 있다(계 21:19-20). 이것은 다양성 안에서의 하나를 상징한다. 한 돌도 같지 않다. 베드로는 한 색이고 요한은 또 다른 한 색이다. 사도들 가운데 나타난 열두 색이 있다. 이는 참된 다양성이다. 그러나 또한 이 다양성 가운데 하나가 있다. 오늘날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가 되지 않은 것같이 보인다. 이것이 참으로 문제이다. 요한은 그의 일을 하고, 베드로도 그의 일을 한다. 다양성은 있으나 하나는 없다. 오늘날 그렇게 많은 은사 있는 형제들이 하나 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함께 일할 것으로 기대되는 형제들조차 하나가 아니다. 각자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게 되도록 혁신시키고자 노력한다. 나는 벽옥이고 당신은 홍보석이라고 가정하자. 문제는 나는 당신을 녹색으로 만들려고 하고 당신은 나를 적색으로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 만약 내가 당신을 바꾸는 데 실패한다면 그 후에 나는 당신과 아무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가련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역을 가진 누군가를 존경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해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되게 하려고 설득시키고 바꾸려는 편협함과 강요를 미워해야 한다. 베드로는 베드로이고 요한은 요한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주 예수님은 아주 크고 놀라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 한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으로는 충분치 않다. 돌들 중 하나이면서 다른 것들과 다르게 되는 것은 참으로 긍휼이다. 다른 사람을 우리와 같게 만들려고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



새 예루살렘에서 묘사된 그리스도
 
서른넷째 항목은 새 예루살렘에서 묘사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그분은 최소한 네 항목으로 나타나 있다. 첫째 그분은 어린양이시다(계 22:1). 심지어 영원에서조차, 주 예수님은 항상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생명의 양식으로 그분 자신을 주신 어린양으로 기억될 것이다. 둘째 이 어린양은 또한 등으로서 그 안에 하나님의 빛이 있다(계 21:23, 22:5을 보라. 흠정역에서 ‘빛’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등’이다). 등은 바로 하나님을 담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그릇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그분 자신을 체현시키셨고, 하나님의 체현인 이 그리스도가 온 성의 중심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는 그분 안에 체현된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그 중심으로 가져야 한다. 셋째로 바로 이 그리스도가 생명의 나무요(계 22:2), 모든 생명 공급의 근원이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린양, 등, 그리고 생명나무로 가져야 한다. 넷째로 그리스도는 심지어 그 성의 성전이시다(계 21:22).


성전
 
역사적으로 말해서, 고대 예루살렘 성안에 성전이 있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이 없다(계 21:22).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과 그리스도께서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성전이시기 때문에, 그분들이 그 성안에 거하는 거주자인지, 아니면 거하는 곳인지를 물을지도 모른다. 그 대답은 둘 다 되신다는 것이다. 그분들은 성전이시다. 거기에서 섬기는 자들이 거하고 섬길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거하는 곳이다. 우리는 이미 어떻게 거주자들이 거처가 되고, 거처가 거주자들로 구성되는지 보았다. 만약 우리가 오늘날 교회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 건축되어야 하고 그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주관적이다. 거주자들이 또한 거처이다. 만약 우리가 새 예루살렘 안으로 건축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 성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곳인 성전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아주 깊다. 오늘 당신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섬기는가? 당신은 물질적인 건물이나 조직 안에 있는가? 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성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하나님 자신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전이시다.


하나님의 거처
 
서른여섯째 항목은 거룩한 성이 또한 하나님의 거처라는 것이다(계 21:3).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 성안에 거하신다. 한편으로 그분들은 우리가 그 안에 거할 성전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들은 또한 그 성안에 거하는 거주자들이시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상호 거처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처요(엡 2:22), 하나님은 우리가 거할 집이시다(시 90:1). 그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5장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셨다(4절). 사실상 그분은 “나는 너희의 거처이고 너희는 나의 거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서로 거처가 된다. 얼마나 심오한가!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는 성이고 우리에게 대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성전이시다. 우리는 우리에게 성전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임재를 갖는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를 위한 성전이 된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둘러싸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덮여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오, 얼마나 우리에게 그분이 필요한지! 그분은 우리가 섬길 분이고, 그분은 심지어 우리가 그 안에서 섬길 성전이시다. 당신은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는가? 당신은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가? 이것은 아주 주관적인 것이다.
 
사람의 논리는 그러한 상호거처가 불합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그러면 도대체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가? 만약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다.”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공기는 우리 안에 있고 또한 우리 밖에도 있다. 공기는 내 안에 있고, 나는 공기 안에 있다. 공기가 내 안에 있지 않다면, 나는 즉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공기 안에 있지 않다면 나는 결코 숨쉴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실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분을 찬양하자. 우리는 생활에서 이것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 어느 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가장 완전하게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이 되시는지를 볼 것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최대한도로 누릴 것이다.


지성소
 
이것은 우리를 서른일곱째 항목으로 이끈다. 거룩한 성에 성전이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온 성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 성은 정사각형이고 세 치수가 같기 때문에 온 성이 성전일 뿐 아니라 지성소이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때에 작은 장막과 제단은 매우 작은 모양이었다. 거기에는 바깥뜰도, 성소도, 지성소도 없었다. 하나님과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그와 함께 장막 바깥쪽에서 거했다(창 18장). 그런 뒤 모세의 때에는 보다 넓게 건축된 제단이 있는 성막이 있었다. 이 성막에 있는 지성소의 세 치수가 같았다. 후에 솔로몬의 성전은 모든 치수를 확대해서 성막과 같은 모형으로 건축되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건축의 최종적인 단계인 새 예루살렘은 오직 한 부분만 있다. 즉 모든 것이 지성소에 의해 흡수된다. 거기에는 더 이상 바깥뜰이나 성소가 없다. 성전이 필요 없는데 이는 온 성이 성전이고, 성의 모든 부분이 지성소로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성이 거룩한 성으로 불리는 한 가지 이유이다. 그러한 성이 하나님의 건축의 궁극적인 나타남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되심
 
서른여덟째 항목은 새 예루살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 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건축의 모든 단계들을 거쳐,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거룩한 성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 되신다.
장로훈련 (2) - 주의 회복의 이상 /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 새 예루살렘 / 위트니스 리
되돌아가기
한국복음서원 이용안내 개인정보보호정책 사이트맵
사업자 등록번호 : 129-38-71911 | 통신판매번호 : 광진 제599호 | 고객정보관리책임자 : 이희득 |
고객지원센터 : 1600-3191 | Email : kgbr@kgbr.co.kr |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190-1 SKn테크노파크 비즈센터 B210호.
COPYRIGHTⒸ 2006 KOREA GOSPEL BOOK ROOM. ALL RIGHTS RESERVED
E-Mail : kgbr@kgb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