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 14:21, 23, 고후 2:10, 4:6-7
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이다.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여야 하며, 그리스도를 사는 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 빌 1:19-21상, 갈 2:20.
A. 우리는 그리스도를 극도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살 수 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온 존재를 그분께 집중하는 최상의 길이다 — 고후 5:14, 요일 4:19, 빌 1:19-21상, 막 12:30, 계 2:4-5, 요 14:21, 23, 21:15-17, 벧전 1:8, 고전 2:9, 16:22.
B.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존재—영과 혼과 몸, 또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막 12:30)—를 절대적으로 그분께 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으로 점유되고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이 잃어버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실지적으로 그분과 하나 된다.
C.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영은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의 깊이들까지도 꿰뚫어 보신다’(고전 2:10). ‘꿰뚫어 보다’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적극적인 탐구와 관련하여 사용되는데, 이것은 발견해서 얻는 지식이 아니라 탐구해서 얻는 정확한 지식을 뜻한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깊이들을 탐구하시어 우리가 깨닫고 참여하도록 영 안에서 그것을 보여 주신다.
D.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아들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누리며, 아버지와 아들께서 우리와 함께 상호 거처를 정하시도록 우리를 방문하시는 것을 누릴 것이다 — 요 14:21, 23.
E.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생활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는 생활을 하셨고, 지금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동일한 사랑의 생활을 하여, 잃어버린 사람을 찾고 죄인을 구원하는 사역 여행을 하신 그분의 존재와 똑같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요일 4:16-19, 눅 10:25-37, 19:10, 엡 4:20-21, 비교 갈 5:13-15.
Ⅱ.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곧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 고후 2:10, 4:6-7.
A.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인격’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직역하면 ‘얼굴’이다. 이것은 눈언저리 부분으로서, 내적인 생각과 느낌을 보여 주는 표정이 나타나는 곳이다. 이러한 표정은 사람의 인격 전체를 보여 주고 나타내는 것이다.
B. 믿는 이들에게 본이었던 사도 바울(딤전 1:16)은 그리스도의 눈에서 표현되는 그분의 인격 전체의 표시에 따라,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살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C. 언제든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면, 너울이 우리의 마음에서 벗어지고, 우리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영광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 사실상 우리의 돌아선 마음이 너울이다. 너울을 벗은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너울을 벗은 마음이다 — 고후 3:16, 18, 4:6-7, 삼상 16:7, 엡 1:18상.
D.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으며, 그분의 얼굴 곧 그분의 인격이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는 보배이다 — 고후 4:6-7, 벧전 3:4.
E. 우리는 가치 없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지만, 우리의 영 안에 지극히 귀한 보배를 담고 있는데, 이 보배는 그리스도 자신의 얼굴, 곧 인격이다(고후 2:10, 4:6). 온 우주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창 32:30, 출 25:30, 33:11, 14, 시 27:4, 8, 계 22:4).
1.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살며 그분의 존재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보배이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면, 다만 그분께 말씀드리기만 하면 된다. 그분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시며, 얼굴을 마주하여 우리와 함께하신다 — 빌 4:6.
2.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과 같으며, 하나님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여 변화되는 것이다(욥 42:5-6, 마 5:8).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바로 이 하나님은 완결되신 영이시며,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그분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풍성을 우리 존재 안으로 흡수하고 매일 신성한 변화를 받을 수 있다(고후 3:18하, 마 14:22-23, 골 4:2).
F.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 계신 주님께 마음을 돌이켜 얼굴을 마주하여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다른 이들 안으로 비추어 넣는 동안(사 60:1, 5), 우리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있으며, 결국 ‘우리는 그분을 그분의 존재 그대로 뵙게 될 것이므로 그분과 같아질’ 날에 이를 것이다 — 고후 3:18-4:1, 요일 3:2, 계 22:4.
Ⅲ.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다 — 엡 4:1-4.
A.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한 행함의 첫째 항목은 우리가 신성한 속성들에 의해, 신성한 속성들로 강화된 변화된 인간 미덕들로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인 그 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는 것이다 — 엡 4:1-4.
1.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의 영 안에는 예수님의 변화된 인성이 있다. 한 몸을 위해 한 영을 마시고 흘려 보내는 것은 사람 예수님의 영을 마시고 흘려 보내는 것, 즉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기 위한 겸허와 온유와 오래 참음이라는, 신성으로 풍성하게 된 인간 미덕들을 지닌 예수님의 인성을 마시고 흘려 보내는 것이다 — 요 7:37-39상, 고전 12:13, 행 16:7, 엡 4:2-3.
2. 우리가 늘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먹는다면, 우리는 사람이신 예수님을 누릴 것이고, 그분의 높아진 인성의 모든 미덕은 예수님의 영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될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인 실재의 영 안에서, 회복된 교회생활을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 고전 1:2, 10:3-4, 17, 12:3하, 13, 16:13, 엡 4:3-4상.
B.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한 행함의 둘째 항목은 우리가 모든 일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이다 — 엡 4:15-16.
1.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한 새사람을 산출하기 위한 모든 것을 포함한 우주적인 대체물로서 누려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만’을 보아야 한다 — 막 9:7-8.
2.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아닌 모든 것이나 그리스도가 아닌 모든 사람을 ‘해고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구약 경륜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대체하셨다 — 막 1:1-8, 마 17:3-5, 골 2:16-17, 히 10:5-10, 11:5-6, 비교 사 22:20-25.
3.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우리를 ‘고용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에 두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으셨을 때, 우리를 ‘해고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하셨을 때, 우리를 하나님-사람들이라는 새로운 종(種), 곧 하나님의 단체적인 걸작품인 하나님의 새로운 발명품으로 만드심으로써 우리를 ‘재고용하시어’, 그분의 영광 곧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의 원래의 의도로 우리를 되돌리셨다 — 창 1:26, 갈 2:20, 엡 2:6, 10, 15, 사 43:7.
C.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한 행함의 셋째 항목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다 — 엡 4:20-24.
1.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는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일생의 실지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생활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삶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활 안에 계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다 — 엡 4:20-21.
2. 그분은 사복음서에 계시된 것과 같이 이 땅에서 사실 때 본을 세우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셔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의해 그분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활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분의 본을 따라 그분께 배우는 것이다 — 고전 15:45하, 골 3:4.
3.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접촉하고 주님께 기도할 때, 복음서들에 묘사된 틀, 모습, 본을 따라 자동적으로 그분을 살게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 틀의 형상으로 형태 지어져 이 틀의 형상과 같은 형상이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말의 의미이다 — 마 11:29, 롬 8:29.
D.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한 행함의 넷째 항목은 우리가 사랑과 빛 안에서 사는 것이다 — 엡 5:2, 8.
1. 우리는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이들 곧 신성한 본성을 누리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벧후 1:4). 신성한 본성은 하나님의 어떠함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며(요일 4:8, 16), 빛이시다(1:5). 영은 하나님의 위격의 본성이고,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이며,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이다.
2. 우리 모두는 주님과의 개인적인 시간을 충분히 갖고서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과 내밀하게 교통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본질로 채워짐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목양하실 수 있고, 주님의 빛나는 요소로 채워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게 된다 — 요 4:24, 눅 15:20, 마 5:15-16.
E.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한 행함의 다섯째 항목은 우리가 영 안에서 충만해져 그리스도를 넘쳐흐르게 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 엡 5:18.
1. 말하고, 노래하고, 시를 읊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는 것은 영 안에 충만한 것의 흘러 나감일 뿐 아니라 영 안에서 충만해지는 길이다 — 엡 5:19-21.
2. 영 안에서 충만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가득 채워져 그리스도의 충만, 그리스도의 넘쳐흐름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은혜 위에 은혜로 계속 받아들여 그분의 충만, 그분의 넘쳐흐름이 될 수 있다 — 엡 3:8, 1:23, 3:19하, 롬 10:12-13, 엡 6:17-18, 요 1:16.
Ⅳ.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징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A.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의 징계를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우리의 맛을 가져가시고 우리의 냄새를 바꾸기 원하신다. 성령의 징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순수한 맛을 갖고 그리스도의 순수한 향기를 풍길 때까지 우리의 타고난 겉사람의 앙금, 찌꺼기가 제거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 담으시는 것이다 — 렘 48:11, 고후 2:14-15, 아 4:16, 왕하 4:8-9.
1. ‘모든 영의 아버지’는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동참하도록’ 시련과 징벌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신다 — 히 12:4-13.
2. 시련과 징벌을 한 번도 통과해 보지 않은 이들은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 담아진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타고난 기질과 겉사람과 자아의 앙금, 찌꺼기, 침전물의 맛이 그들 안에 남아 있고, 그들의 냄새도 변하지 않았다 — 렘 48:11, 롬 8:28-29, 아 4:16.
B. 마리아는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일 리트라로 채워진 옥합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옥합을 깨뜨려서 향유를 주님께 부었을 때, ‘그 집이 향유의 향기로 가득 찼다’ — 요 12:2-3, 막 14:3, 비교 아 1:12.
C. 옥합은 우리의 겉사람을 상징한다. 우리의 겉사람은 속사람이 뚫고 나올 수 있도록 파쇄되어야 한다. 주님은 질그릇, 옥합, 겉껍질을 파쇄하시려고 매우 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위에 일하신다 — 고후 4:7, 요 12:3, 24, 롬 8:28-29.
D. 우리의 선천적인 어떠함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그 영께서 우리 존재 안으로 조성하신 것만이 가치가 있다. 성령의 징계는 우리의 타고난 기질과 습관을 깨뜨리고, 성숙하고 달콤한 성령의 조성을 이끌어 온다. 하나님은 우리 환경 안의 모든 것을 안배하심으로써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허물어뜨리시어, 우리 안에 새로운 기질과 새로운 성격과 새로운 속성들을 형성하신다 — 요 3:6, 고후 5:17, 갈 6:15.
E. 파쇄되지 않는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다.
1. 어떤 사람이 파쇄되지 않는 것은 그가 어둠 속에 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서 모든 잘못을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에 돌린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대한 계시가 없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루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계시가 없다 — 비교 욥 10:13, 엡 3:9.
2. 어떤 사람이 파쇄되지 않는 것은 그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자기 사랑을 제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모든 오해와 불만은 오직 한 가지, 곧 은밀한 자기 사랑에서 생긴다.
F. 우리는 자신이 통과하는 모든 일에 오직 한 가지 목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해방되고 우리 안에서 표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속사람이 해방되고 표현될 수 있는 정도까지 우리 겉사람이 파쇄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보배로운 것이며, 이것이 주님의 종들이 가야 할 길이다 — 요 12:24-26, 고후 4:12.
영의 해방과 하나님의 표현을 위해 겉사람이 파쇄되는 것에 관한 교통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아주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은 우리가 죄인들과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과 함께함으로써 그들 안에 의(義)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생겨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나가서 사역할 때 반드시 사람들 안에 배고픔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여러분 안에 반드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선함과 능력과 자양분과 공급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여러분이 사람들과 함께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만나 여러분과 이야기할 때, 여러분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고 싶은 느낌이 생겨나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늘 여러분과 만나고 여러분과 왕래하는데, 여러분이 그들 안에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생기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실패이다. 설령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복음을 전파할지라도 사람들 안에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면, 여러분의 일은 실패이다.(워치만 니 전집, 개정판, 42권, 특별 집회, 메시지 및 대화 기록(2), 31장, 24-25쪽)
열왕기하 4장에서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영접한 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한 부유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식사를 대접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지나갈 때마다 거기 들러 식사를 하곤 하였다. 그 여인이 남편에게 말하였다. ‘늘 우리를 거쳐 지나가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것을 나는 이제 압니다.”(8-9절)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갈 때, 그는 한 편의 메시지를 전한 적도 없고 기적을 행한 적도 없었다. 엘리사는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그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었다. 그 여인은 그가 음식 먹는 방식을 보고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가 사람들에게 준 인상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가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이 무엇이고 우리에게서 나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겉사람이 파쇄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언급했다.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을 때, 우리가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은 오직 우리 겉사람뿐일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거나, 찌르고 강퍅하고 교만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할 것이다. 혹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총명한 사람이거나 구변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줄 것이다. 혹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소위 좋은 인상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인상이 교회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실 수 없고, 교회도 이러한 소위 좋은 인상은 필요하지 않다.
… 만일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영은 해방될 수 없고 사람들에게 영의 인상을 줄 수도 없다.
… 사람들 안에 인상을 남겨 주는 것은 바로 우리 존재에서 가장 강한 부분이다.(워치만 니 전집, 개정판, 54권,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8장, 296-2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