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의 역사는 길고, 그 일의 범위는 다양하고 광범위합니다. 그 역사의 시작에는 주후 700년경에 탄생한 시편의 최초 번역본이 있습니다. 그 이후 1300년대 말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지휘 아래 라틴어를 기초로 성경 전권이 번역되었고, 1525년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이 헬라어를 바탕으로 신약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다음으로 기념비적인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이 1611년에 히브리어와 아람어와 헬라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었고, 그 이후 1885년에 근대 시대에 맞춰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1901년 미국 표준역 성경(American Standard Version)이 출간되었고, 그 뒤를 이어 20세기에 수많은 다른 번역본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렇다면 회복역 성경(Recovery Version)이라는 또 다른 번역본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리 형제님이 1962년에 미국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보통 흠정역 성경을 성경 본문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형제님은 성경의 원문의 의미에 충실하기 위해 자주 흠정역 성경의 번역을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연장한 지체들은 여백이나 줄 사이에 더 나은 번역을 세밀하게 손으로 기록한 흠정역 성경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성신(Holy Ghost)’은 ‘성령(Holy Spirit)’으로,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저택(mansions)’은 ‘거할 곳(abodes)’으로, 디모데 전서 1장 4절에서 ‘경건한 교훈(godly edifying)’은 ‘하나님의 경륜(God’s economy)‘으로,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서 ‘그분의 명령을 행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blessed are they that do his commandments)’는 ‘자기의 겉옷을 빠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blessed are those who wash their robes)’로 각각 변경되었습니다. 이 예들은 리 형제님이 바로잡은 수백 개의 번역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문서를 출판할 때 리 형제님은 일반적으로 흠정역 성경보다는 원문에 훨씬 근접하게 번역된 미국 표준역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구시대적인 번역이 간간이 등장해 읽는 이들을 골치 아프게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정확하며 현대적인 번역본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새로운 번역본들이 다수 존재했지만, 그중 어떤 번역본도 우리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하지는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어떤 번역본도 우리가 지난 백 년에 걸친 성경 연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원문의 매우 섬세한 의미를 정확히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원문의 표현들이 수백 개에 달하는데, 앞으로 발간된 이 소식지에서 하나씩 하나씩 집중적으로 다뤄보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다음의 말씀에 기록된 원문의 의미를 존중하는 번역본이 필요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의 ‘하늘에서 이미 묶인 것이고/풀린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의 ‘안으로 침례를 주고’, 요한복음 3장 16절의 ‘그분을 믿는’, 사도행전 13장 1절의 ‘그 지방에 있는 교회’,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거울처럼 …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에베소서 4장 16절에서 ‘각 마디를 통하여 …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등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여러 많은 절들을 더 정확하게 번역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래 지면을 통해 우리가 왜 이 정도까지 정확성에 주의를 기울였는지 설명하려고 합니다.

둘째로 회복역 성경에 대한 부담을 취할 때 리 형제님의 의도는 좀 더 정확한 성경의 번역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진리 안으로 인도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며, 성경 안에 존재하는 일반적이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며, 성경의 각 권을 완전히 열어주는 철저한 각주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목적을 다루는 기사가 이 뉴스레터 1호와 2호에 실려 있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인하여 이러한 규모의 각주를 최신 번역본 성경에 첨부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새롭게 번역해야 할 또 하나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이유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완전한 주석을 달고자 한다면 다른 이들의 번역을 사용하지 않고 마땅히 우리가 직접 수고해서 번역한 성경 본문을 사용해야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내놓는 번역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지 않고 직접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는 데에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 거듭해서 더 잘 번역될 가치가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위대한 작품들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재차 번역되었습니다. 확신하건데 그 작품들은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 새롭게 번역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 작품들보다 더욱 그렇게 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번역될 때마다 수천 개의 언어권의 사람들에게 그분의 말씀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하지만 번역본은 성경 원문의 온전한 의미를 전달하기에 불완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을 통해 완전하게 담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성경에 적힌 문자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영입니다.

물론 성령은 번역본을 통해서도 운행하실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십니다. 사실 그 영께서 이미 신약성경에서 번역을 허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인용된 구약성경의 말씀들이 사실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되었지만, 여전히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번역은 마땅한 것입니다(비교 느 8:8).

그러나 그 누구도 성경의 특정한 번역이 완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번역의 질이 좋다는 전제하에서,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는 것은 어느 언어에서든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불행하게도 몇몇 사람들은 새로운 번역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봅니다. 그 주된 이유는 그들이 기존의 번역본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만족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성경의 모든 번역본이 어느 면에서 부족이 있다는 단순한 진실과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 거듭 번역될 필요가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한 무리의 믿는 이들이나 한 개인이 다시 성경을 번역하려는 부담을 짊어지는 것이 몇몇 사람들이 비난하듯 반드시 탈선과 종파주의의 징후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징표일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의 단체나 개인들이 했던 영어 성경 번역의 유구하고 다채로운 역사가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지방 교회에 있는 여러분은 왜 본인들이 직접 성경을 번역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에게 “왜 여러분은 직접 성경을 번역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이 책은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사랑한다면 분명 성경 원문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할 것이며, 또한 원문의 이해에 근거해 번역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성경의 번역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한 이들을 비난할 그 어떤 입지도 없으며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주님의 회복에 있는 우리는 열정적으로 수고하여 새로운 성경 번역본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 번역본은 정확성 방면에서 성경의 세부적인 항목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번역되었고 매우 타당한 사유를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번역의 정확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대상 독자들 즉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각 지방 교회들의 형제자매님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은 각 지방의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를 훈련시켜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이들이 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성경 본문의 일반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 표현의 정확한 의미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우리는 또한 이것들을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말하지 않고, 그 영께서 가르치신 말씀으로 말합니다.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고전 2:13)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역은 성경에 나타난 영적인 것들만이 아니라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 그 영께서 주신 말씀에도 주의합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단지 성경이 ‘무엇을’ 말했는지 뿐만 아니라 성경이 정확히 ‘어떻게’ 그것을 말했는지를 소중히 여기도록 배웠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저자들이 그 영께서 주신 영감에 따라 실지로 기록한 것을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유형의 독자이기 때문에 회복역 성경의 번역은 때때로 유려한 문체를 희생해서라도 정확성을 높이는 데 집중했습니다. 또한 다소 어색하더라도 원문의 의미에 더 가깝게 번역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다면 의역에서 자칫 놓칠 수도 있는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독자들이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 그대로의 의미 전달을 추구하는 것이 회복역 성경의 주요한 특징이며, 이것이 이 성경의 주된 독자들이 갈망하고 기대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원문 그대로의 의미 전달에 집중하여 번역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첫 번째 이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필요한 성경의 모든 독자에게 이러한 성경 번역본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흠정역 성경으로부터 가장 최근의 번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경의 번역본에는 다양한 특징이 있으며, 독자들은 자신의 선호와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문학적으로 번역된 성경을 선호하고, 다른 이들은 이해하기 쉬운 성경을 선호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나름의 취향과 기대하는 바에 따라 성경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지구상에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소수의 독자들이 존재하고, 우리에게 성경 원문에 최대한 근접한 (물론 가독성을 완전히 희생하지 않은) 번역본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록 대중적인 호응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처럼 원문에 충실한 번역본도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들을 위해 회복역 성경을 내놓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회복역 성경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주장하는 바이며, 지면의 제한으로 세부적인 부연 설명까지 다 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지의 이어지는 호들에서 더 많은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해드리기를 희망합니다. 그때는 회복역 성경의 원문의 정확한 의미를 보존하려는 번역 원칙에서 더 나아가 더욱 중대한 문제, 즉 성경 안에 담긴 신성한 계시를 더 온전하고 합당하게 이해하기 위해 왜 이러한 유형의 번역이 중요한지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