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역 성경은 요한복음 4장 23절과 24절에서 사용된 ‘알레테이아(헬. aletheia)’를 ‘진실함(truthfulness)’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러한 표현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영어로 번역된 대부분의 성경에서 이 두 구절에 있는 ‘알레테이아’는 ‘진리’로 번역되었고, 회복역 성경 초판에서는 ‘실재’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번역은 해당 문맥에서 헬라어 단어 ‘알레테이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궁극적으로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경배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는 방면에 있어서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회복역 성경 요한복음 4장 23절과 24절에서 헬라어 ‘알레테이아’는 ‘진실함’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경배자들이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고 있는데, 바로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이렇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경배하는 사람들은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경배해야 합니다.”

이러한 번역은 요한일서 1장 6절 각주 5에 근거하는데, 이 각주는 ‘진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설명합니다. 리 형제님은 1983년 봄, 그해 7월에 있을 여름 훈련 집회를 위하여 요한일서 회복역 성경을 준비하던 중 이 특별한 각주를 썼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이 이 각주의 내용을 읽고 연구하고 심지어 학습하시기를 강력히 추천 드립니다. 이 각주를 집필할 때 리 형제님은 신약에서 헬라어 ‘알레테이아’가 쓰인 거의 모든 절들을 주의 깊게 고려한 후에 그 의미를 여덟 개의 범주로 분류했습니다. 이 분류된 범주에 기반을 둔 회복역 성경은 이 헬라어 단어를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각각 ‘진실함’과 ‘진리’와 ‘실재’로 번역했습니다. 이 헬라어 단어에 일곱 번째로 할당된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7) 참됨, 진실함, 성실함, 정직함, 신뢰할 만함, 신실함. 하나님께 있는 이러한 미덕은 신성한 미덕이고(롬 3:7, 15:8), 사람에게서 표현되는 이러한 미덕은 인간의 미덕이며(막 12:14, 고후 11:10, 빌 1:18, 요일 3:18), 신성한 실재가 흘러나온 것이다(요 4:23-24, 요이 1상, 요삼 1).(요한일서 1장 6절 각주 5)

따라서 요한복음 4장 23절과 24절에서 쓰인 ‘알레테이아’는 주로 ‘신성한 실재가 흘러나온’ 산출물인 진실함을 의미하며, 바로 이 의미가 우리가 이곳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특유한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번역본이 헬라어 단어 ‘알레테이아’를 ‘진리’로 번역하지만, 이러한 번역은 해당 문맥에 부합하는 적절한 번역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진리에 따라 경배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아버지를 경배할 때 올바른 교리에 근거한 방식에 따라 아버지를 경배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해당 문맥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러한 단순한 이해를 거부하시는 것처럼 보이십니다. 요한복음 4장 21절에서 주님은 이제 아버지께서 새로운 경배를 갈망하고 계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경배는 단지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했던 그리심산과 대립되는 예루살렘이라는 올바른 물리적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경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에 경배하고, 유대인들은 아는 것에 경배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원을 유대인들에게 가져다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 4:22).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단지 진리에 따라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진리에 따른 경배가 더 위대한 경배로 대체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1985년에 출간된 회복역 성경을 비롯하여 몇몇 영어 번역본들은 ‘알레테이아’를 ‘실재’로 번역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실재’가 이 문맥 속의 의미에 훨씬 더 근접한 번역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의 본문과 각주는 1975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1985년에 출간된 회복역 성경은 이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진리’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 ‘실재’는 우리가 종교적인 세상에서 목격하는 공허한 경배의 형식과 대립하는 참된 경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실재이시므로, 그분의 믿는 이들이 그분께 드리는 경배 역시 실재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몇몇 사람들은 실재 안에서 드리는 경배는 텅 빈 경배가 아니라 실재의 경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실재’는 틀림없이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요 14:6),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아버지께 우리가 드리는 경배의 중심과 수단이 되셔야 합니다. 따라서 고대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계시된 진리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제물을 가져갔지만, 아버지께서 이제는 구약에서 예표로 쓰인 모든 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드리는 경배자를 찾으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의 성경 교사들은 요한복음 4장 23절과 24절의 경배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1975년 판 회복역 성경의 요한복음과 이를 그대로 가져온 1985년 판 회복역 성경의 번역이 처음 제시했던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조차도 완전한 의미에는 모자라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실제로 찾으시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경배가 아니라 경배자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경배자들’이나 ‘이렇게 경배하는 사람들’이나 ‘경배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볼 때, 요한복음 4장 23절과 24절의 초점은 경배의 행위가 아니라 경배자에게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참고할 때, 이 절들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것은 단지 참되거나 실지적인 행위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사람입니다. 이에 따라서 1983년에 리 형제님은 헬라어 ‘알레테이아’에 대한 종합적이며 철저한 연구를 진행한 이후에 이 말씀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이 절들에 대한 각주를 개정하고 보강했습니다. ‘경배’에 대한 원래 각주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음 되었습니다.

… 실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요 4:25-26), 모든 그림자와 예표는 지나갔다.(요한복음 4:24 각주 3, 1975년 판과 1985년 판)

리 형제님이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개정할 때, 형제님은 위 부분을 ‘영’에 대한 각주로 위치를 옮겼고, 영에 대한 각주의 마무리는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습니다.

진실함이라는 인간 미덕을 산출하는 실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요 4:25-26), 모든 그림자와 예표는 지나갔다.(요한복음 4:24 각주 4, 1991년 판과 2003년 판)

그 이후에 리 형제님은 헬라어 ‘알레테이아’를 ‘진실함’으로 새롭게 번역했고 이단어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각주를 추가했습니다.

4장의 문맥과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계시에 따르면, 여기서의 ‘진실함’은 하나님께 참되게 경배하기 위하여, 신성한 실재가 사람에게 참됨이 되고 성실함(이것은 부도덕한 사마리아인 경배자의 위선과 반대된다―요 4:16-18)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신성한 실재는 실재(요 14:6)이신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한 구약의 모든 제물의 실재이시고(요 1:29, 3:14), 믿는 이들이 참여하고 마신 생수의 원천, 곧 생명 주시는 영(요 4:7-15)으로서 믿는 이들 안에 실재가 되시는 분이시다. 이 실재는 결국 믿는 이들에게 참됨과 성실함이 되어, 그들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경배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요한일서 1장 각주 6, 로마서 3장 7절, 15장 각주 8 참조.(요한복음 4장 24절 각주 5)

오늘날 아버지는 어떠한 종류의 경배자를 찾고 계십니까? 아버지께서 오늘날 찾고 계시는 경배자는 고대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에서 물질적인 제물을 가지고 ‘진리에 따라’ 경배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단지 객관적으로 드림으로써 ‘실재 안에서’ 경배하는 이들 역시 아닙니다. 그보다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경배자들은 ‘진실함으로’ 경배하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경배자들 안에서 실재이신 그리스도는 그들의 내적인 실재가 되어 그들이 아버지를 경배할 때 그들의 진실함과 참됨과 성실함이 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다만 진리에 따라 경배하는 것이었다면, 그분은 고대 유대인들이 바치던 경배를 계속 기쁘시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다만 실재가 있는 경배였다면, 그분은 신약의 믿는 이들이 믿음으로 객관적으로 드리는 그리스도를 계속 기쁘시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말씀에 있는 진리에 따른 고대의 경배를 제쳐두셨다는 사실을 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갈망하시는 것이 우리가 객관적으로 바치는 모든 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 그 이상임을 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님의 상에 이어서 아버지를 경배할 때,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경배자입니까?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서 번제물의 실재로서 절대적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선포합니까?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이 죄악 됨을 자백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의 실재가 되셨다는 것을 믿고 선포합니까?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이 타락한 사람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소제의 온전한 실재이신 분임을 믿고 선포합니까?

물론 이 모든 항목들은 그 자체로 놀랍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것은 이 이상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경배자들은 실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그들의 내적 실재가 되시어 진실함이라는 단어의 온전한 의미에 부합하는 인간 미덕이 되시는 이들이며, 신성한 실재가 그들의 미덕을 산출함으로 그분의 참된 경배자로 존재하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경배를 위한 때가 오고 있고, 그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이 찾으시는 경배자들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