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까지 찬송가의 역사, 찬송을 연구해야 하는 필요성, 좋은 찬송가가 지닌 특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여러 다양한 상황 속에서 찬송가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관하여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주님의 상 집회에서 찬송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몇 가지 원칙을 고려하겠습니다.

이 프로젝트 내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이 일을 감당하고 진행할 수 있도록 하시는 그분의 축복과 넘치는 공급과 우리를 지탱하는 은혜를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해 주실 수 있으신”(엡 3:20) 그분은 우리의 체험에서 실재가 되셨습니다. 니 형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근 나에게는 줄곧 한 가지 느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축복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에게는 충성심이 있는데, 비록 당신이 충성한다 해도 축복이 없으면 열매가 없다. 우리는 또한 자주 매우 부지런히 수고하지만, 그러한 근면함에도 불구하고 축복과 열매가 없다. 많은 경우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믿으며 또한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을 때 여전히 헛되다.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조만간 하나님의 축복을 앙망하는 경지까지 이끌림 받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면, 설사 충성심이 있고 부지런하며 믿고 기도할지라도 소용이 없다. 만일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면, 마치 틀린 것 같아도 열매가 있다. 희망이 없는 것 같을지라도 열매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에 달려 있다.(워치만 니 전집, 56권, 복간 부흥보, 38기, 하나님의 축복을 앙망함, 218쪽)

기본 원칙은 “집회에서 선정하는 곡들은 그 특정 집회의 성격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새 신자 레슨(상), 10과, 220쪽)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상 집회에서 우리는 선정하는 찬송이 주님을 기념하고 아버지를 경배하는 데 적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주제에 관련해서, 리 형제님이 관찰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만찬의 목적은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어야 한다. … 그러나 주님의 상에서 부르는 어떤 찬송가는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찬송가가 매우 좋을지라도 만찬의 성질과 맞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신언의 실행, 2장, 29쪽)

우리의 찬송가 안에 많은 놀라운 찬송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떤 곡의 주제는 복음 전파에 관한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찬송들은 주님의 상 집회가 지닌 성격과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곡들은 다른 상황에서 최상의 누림을 제공할 수 있는 찬송들입니다.

또 다른 원칙은 주님의 상 집회 가운데 흐르는 분위기나 정서를 감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 형제님은 그의 사역에서 이 원칙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원칙에 대해 충분히 숙고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의 상 집회와 생명의 추구를 위한 지침’에서 리 형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일 때에는 항상 어떤 분위기가 있다. 우리는 그 분위기, 그 느낌을 감지하기를 배워야 한다.”(주님의 상 집회와 생명의 추구를 위한 지침, 4장, 67쪽)

같은 책에서 리 형제님은 찬송가를 선곡하는 것은 집회에서 감지되는 분위기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찬송은 느낌들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어떤 느낌이 없다면 그런 느낌을 표현하는 찬송을 부를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하는 찬송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찬송을 선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분위기를 만질 때, 그 집회에 편만한 느낌에 따라 그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하는 찬송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렇게 찬송을 선택할 때, 그 느낌이 표현되어 회중의 찬송을 통해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이 찬송을 선택하는 원칙이다. (주님의 상 집회와 생명의 추구를 위한 지침, 4장, 63쪽)

주의 상 집회에서 성도들의 전체적인 느낌을 만지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계속되는 배움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배움의 한 측면에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을 제쳐두는 것이 수반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집회 가운데 흐르는 정서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찬송가들을 철저하게 인지하는 것이 수반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집회 도중에 그 집회의 정서와 분위기에 맞는 찬송가를 선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찬송가들을 범주와 내용과 초첨과 정서와 맛에 따라 숙지해야 합니다. ‘봉사에 대한 기본 공과’의 주님의 상 집회의 실행을 다루는 장에서 리 형제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의 상 집회에서 적합한 찬송을 선곡하기 위해서는 먼저 찬송들을 그들의 범주에 따라 알기를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 찬송가에 있는 내용 목차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찬송가에는 모든 찬송이 내용별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찬송들의 내용을 읽고 심지어 연구하기까지 해야 한다. 또한 각 찬송의 중심 사상 곧 중점을 찾아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찬송들이 주는 정서와 맛도 알 필요가 있다. 각각의 찬송은 그 나름의 정서를 지니고 있으므로 특유의 맛이 있다. 이러한 네 방면, 곧 내용 범주에 따라, 내용에 따라, 중점에 따라, 정서와 맛에 따라 찬송을 알 때 우리는 찬송들을 철저히 알게 된다.(위트니스 리 전집, 1979년, 2권, 봉사에 대한 기본 공과, 4장, 51쪽)

찬송가의 정서와 맛에 있어서 우리는 곡들을 바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주님의 상 집회에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불러본 적이 있는 두 곡의 찬송이 있습니다. 한 곡은 ‘넓고 깊은 주의 사랑’(찬송가 130장)이고 다른 한 곡은 ‘내 구주 예수 크신 사랑’(찬송가 134장)이다. 두 곡 모두 탁월한 곡이며 찬송가에서 ‘그리스도를 찬송함 - 그분의 사랑'이라는 범주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 구주 예수 크신 사랑’의 정서는 깊고 심오한 반면에, ‘내 구주 예수 크신 사랑’의 정서는 달콤하고 부드럽습니다.

이러한 맛의 차이를 고려할 때, 주님의 상 집회 흐르는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따라 그중 한 곡이 다른 곡보다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 다만 찬송가의 범주와 내용과 중점에 따라서만이 아니라 정서와 맛에 따라 알아가고 친숙해질 때, 우리는 더 장비되어 집회의 정서와 어울리는 찬송가를 선곡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집회 안에 흐르는 그 정서가 성도들의 찬송과 찬양을 통해 표출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원칙은 이전 방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가 주님의 상 집회에서 선곡한 찬송가이 집회의 진행 상황과 들어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집회의 전체적인 흐름을 따르고 적절한 때에 적절한 찬송가를 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떤 곡들은 주의 상 집회의 도입부에서 더 적합하고, 다른 곡들은 집회의 분위기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더 적합하며, 또 다른 곡들은 집회를 끝맺을 때 더 적합합니다. (새 신자 레슨(상), 10과, 220-221쪽 참조)

주님의 상 집회에 관하여 1979년에 주어진 한 메시지에서 리 형제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의 상은 일종의 잔치이다. 잔치에는 여러 요리가 나오는데, 그 요리들은 되는 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순서에 따라 나온다.”(위트니스 리 전집 1979년, 1권, 여러 주일 집회에서의 교통, 215쪽)

이 빛에 따라, 주의 상 집회에서 우리가 선곡하는 찬송은 그 집회의 진행 상황과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찬송을 선곡하기 전 우리는 “집회의 도입부 단계에서 ‘전채 요리’를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집회가 절정에 이르러 맛있는 ‘메인 요리’를 누리는 단계로 진행되었는가? 아니면 이제 달콤한 ‘후식’을 누리고 있는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 항목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주의 상 집회에서 어떤 곡을 선정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언제 그 곡들을 부를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주의 상 집회에서 전체적인 흐름에 따라 찬송가를 선곡하는 것에 관하여 리 형제님은 다음의 예를 제시했습니다.

어떤 주님의 상 집회에서는 누군가가, 높지는 않지만 깊고 부드러운 찬송인 찬송가 77장을 부르자고 할 수 있다. 이 찬송은 주님의 인간 생활과 관련하여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다. … 주님의 상 집회에서 이 찬송을 부른 후에 곧장 누군가가 “면류관 씌우세 보좌의 어린양”이라고 시작하는 찬송가 1037장 같은 찬송을 부르자고 한다면 연속성이 부족할 것이다. 어떤 찬송을 부르자고 한 후에 우리는 그 찬송을 맛보고 소화하는 데 시간을 좀 보내야 한다. 대부분의 찬송을 소화하기 위해 찬양하는 기도가 적어도 네다섯 번 필요하다. 잔치에 나오는 요리들은 빠른 순서로 나오지 않고, 각 요리 사이에 누리는 시간이 있다. 한 찬송을 부르자마자 다른 느낌의 찬송을 부르자고 하는 것은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만 주의하는 것이다. 우리가 찬송을 선곡할 때 그 찬송은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을 기념하는 합당한 영을 건축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배워야 하지만, 그 누구도 낙심해서는 안 되고 이런 교통을 율법적인 규정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위트니스 리 전집 1979년, 1권, 여러 주일 집회에서의 교통, 215쪽)

물론, 몇몇 경우에서 주의 상 집회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찬송가 선곡을 ‘삼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찬송가를 선곡하는 것이 오히려 그 영의 흐름을 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터와 교회 집회’에서 리 형제님은 주의를 환기하는 건강한 말씀을 주었습니다.

처음 집회를 시작할 때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기도의 흐름이 있었다고 하자. 이런 순간에 찬송 몇 장을 부르자고 제안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 순간은 영 안에서 더 많은 기도의 흐름이 나오는 때이므로 아무리 좋은 찬송을 부르더라도 흐름을 망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경우를 제시해 보자. 아버지에 대한 경배는 분명 주일 집회에 있어서 가장 좋은 부분이다. 그런데 집회가 최고의 수준에 올라갈 무렵, 어떤 찬송 하나가 흐름을 꺾어버릴 수 있다. 마치 타오르는 불에 찬물을 확 끼얹은 격이다. 이제 두세 번만 더 기도하면 집회가 정점에 도달하리라는 참된 느낌이 든 순간, 흐름에 맞지 않는 찬송 때문에 입이 닫혀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찬송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형식과 의례와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흐름을 감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단순한 지식은 잊어버려야 한다. 먼저 우리는 흐름을 느껴야 하고 그다음 합당한 지식을 사용하여 제대로 합당하게 집회해야 한다.(위트니스 리 전집, 1965년, 2권, 교회의 터와 교회 집회, 4장, 374쪽)

결국 주님의 상 집회의 취지는 찬송을 부르는 행위가 아니라 가장 깊이 그리고 충만하게 우리의 주님을 기념하는 것과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아버지를 경배하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쓰임새는 이 높은 의도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머지않아 우리가 찬송가를 이 목적에 따라 노련하게 사용하도록 훈련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배우고 수고하는 영을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