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에 시작하여 1995년까지 위트니스 리 형제님은 성경 전체의 각 권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고 이 연구를 라이프 스타디라고 불렀습니다. ‘라이프 스타디’라는 명칭으로 출판된 도서는 총 1,984개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메시지들은 주의 회복에 있는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풍성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2023년 5월에 라이프 스타디의 주 편집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란 캔거스 형제님과 라이프 스타디 출판에 관한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 기사에서는 그 인터뷰의 전반부를 소개하고, 여기서 소개하지 못한 후반부는 다음 편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란 캔거스 형제님, 라이프 스타디 출판의 역사와 형제님께서 참여했던 부분에 관하여 저희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답변: 1974년 1월에 리 형제님은 미국에 있는 각지 교회의 책임 형제들에게 그달의 한주 주말 동안 로스앤젤레스로 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금요일 밤부터 주일 오후까지 다양한 집회가 있었습니다. 이는 미국에서 주님의 회복이 지속적으로 전진하는 것과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주요 사안은 리 형제님의 사역과 라이프 스타디와 관한 것이었습니다.

리 형제님은 실지적인 측면에서 사역의 본거지를 로스앤젤레스에서 오렌지카운티로 이전해야 한다는 인도와 부담이 있음을 분명히 밝혔고 애너하임으로 이전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형제님에게 매우 의미있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리 형제님은 자신이 마주한 거대하고 엄청난 과업에 대한 느낌을 공유한 뒤에, 성경에 대한 라이프 스타디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이 리 형제님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이유는 첫째, 이것이 주님의 인도였기 때문이었고, 둘째,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 각 권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실시할 기회가 그간 리 형제님에게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 형제님이 라이프 스타디를 시작하였을 때, 이미 형제님의 나이는 예순여덟이나 아홉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995년 여름 훈련 집회에서 리 형제님은 마침내 이 일을 완수했습니다.

리 형제님이 1974년 1월에 있었던 집회 중 하나에서 다루었던 주제는 여러 작은 교회들이 함께 모여 한 도시에 있는 교회가 되는 것에 관한 느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디트로이트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서 있던 대다수의 성도들은 플로리다로 이주해야 한다는 인도를 받았지만, 저는 캘리포니아에 있어야 한다는 인도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집회 후에 저는 리 형제님과 간략한 교통을 나눴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리 형제님이 회복역 성경을 위해 신약을 번역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중에는 이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빨리 기쁜 마음으로 그러한 전문가에게 일을 양보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고대 헬라어부터 신약에 사용된 ‘공용 헬라어’에 이르는 헬라어 과정을 수년간 학습했기 때문에, 제가 기꺼이 리 형제님을 도울 마음이 있고 시간도 낼 수 있다는 것을 형제님에게 말씀드려야 한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로마서 번역부터 시작하기 원했습니다. 몇 분 후 리 형제님은 제게 다가와서, “아주 좋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해 봄에 애너하임으로 이주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동역자 중 한 분이 리 형제님 대신 전화해서, 리 형제님은 제가 애너하임에 거주하게 되면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를 편집하는 일을 담당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리 형제님은 4월 첫 주부터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할 계획이었고, 제가 와서 이 일을 위한 체계를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너하임으로 갔습니다.

리 형제님은 오렌지카운티 남부에서 라이프 스타디 집회를 가졌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주일 오후까지 몇 주간 집회가 계속되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리 형제님은 창세기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고, 주일 오후에는 마태복음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형제님은 이렇게 두 노선을 유지했습니다. 우리는 오렌지카운티의 믿는 이들과 주님을 추구하고 말씀을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이들이 집회에 참석하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여 기도하는 방식 때문에 참석자들이 놀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 주 동안 우리는 평소에 모였던 방식대로 집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종의 형식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가짜임을 깨달았고 우리가 원래 모이던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본연의 모습대로 모여야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지혜로운 방식으로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모임이 대략 1974년 6월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다음 리 형제님은 1974년 8월을 시작으로 일 년에 두 차례 라이프 스타디 훈련 집회를 실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로마서 회복역 번역 작업에 함께 수고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수고했지만, 훈련이 시작되기 오 일 전쯤에 리 형제님의 한 쪽 눈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긴급하게 전문적인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술 후에 몇 주의 회복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리 형제님은 네 명의 동역자에게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요청하셨는데 라이프 스타디의 노선이 아닌 방면에서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생명의 체험에 관한 다양한 방면에 관하여 훈련을 진행하는 위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라이프 스타디 출간하는 일과 함께 두고 말해보겠습니다.

1978년에 그 네 명의 동역자 중 한 명이 배역을 주도했습니다. 십 년 후에 그중 두 명도 주님의 회복을 떠났습니다. 1984년에 그중 네 번째 동역자는 매우 치명적인 암에 걸려 같은 해 가을에 사망했습니다. 같은 해에 중국에서 수십 년간 리 형제님과 알고 지냈던 나이가 더 연장하고 신실한 한 형제님도 돌아가셨습니다. 그 시절에는 모든 일이 단순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추모 집회가 없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제가 어떤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두 형제님 중 한 분의 장례식을 위해 묘지에 모였고, 리 형제님은 그들이 두 승리한 이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이 일을 부차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끝까지 충성스러운 이들로 남기 위해서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성도들이 보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눈 수술을 받고 회복한 이후에 애너하임에서 있었던 한 집회에서 리 형제님은 주님께서 형제님에게 “기도 받기 위해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1974년 12월에 우리는 처음으로 라이프 스타디 훈련 집회를 시작했습니다. 다뤄진 책들의 순서는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1975년 봄에 워싱턴 D.C.에서 열린 훈련 집회에서는 요한복음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과 12월에 애너하임 컨벤션센터에서 히브리서에 관한 두 차례의 훈련 집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애석하지만 히브리서 훈련 집회 영상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몇 년 후에 리 형제님은 히브리서에 관한 훈련 집회가 그에게 가장 귀한 집회였다고 말했습니다. 그 집회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정말 놀라웠습니다.

1976년 초에 애너하임의 집회 장소를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장소는 교회와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를 위한 용도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장소는 주로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일부는 교회 집회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애너하임의 집회소에서 열린 첫 번째 반기 훈련에서 요한계시록이 다뤄졌습니다. 이렇게 라이프 스타디 훈련 초기에 로마서와 요한복음과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이 다뤄졌습니다.

1977년 7월과 12월에 마태복음에 대한 훈련이 실시되었고, 리 형제님은 이어서 바울의 심장 서신, 즉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를 다루었습니다. 훈련은 이러한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리 형제님은 이전과 달리 금요일부터 주일까지 라이프 스타디 집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중에 한 번씩 사역 집회를 열어 라이프 스타디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 시간을 사용하여 수개월에 걸쳐 창세기를 다루는 다른 한 노선을 유지했습니다. 창세기 다음 출애굽기를 다루었는데, 그 책을 다루는 데는 단지 수개월이 아니라 몇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매년 두 차례의 훈련 집회에서 리 형제님은 특정한 성경의 책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그 외 특별 집회에서는 특별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1974년 봄을 시작으로 저는 리 형제님과 함께 라이프 스타디를 작업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리 형제님께 저를 인내하고 짊어질 수 있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리 형제님은 제 나이의 두 배였습니다. 이 시대의 사역자였던 형제님은 자신이 수년간 지내 온 아파트에서 한 테이블을 두고 저와 함께 앉았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아침 8시 반부터 12시나 12시 반까지 함께했습니다. 리 형제님이 제게 라이프 스타디를 맡기셨지만, 이내 그분은 저를 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처음 몇 메시지를 작업한 후 저는 주님과 홀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한 것이 주님과 리 형제님의 중보 기도 때문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제가 전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리 형제님의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저는 형제님의 영을 따라 그분의 어휘와 부담과 강조점과 방식을 사용하여 이 메시지들을 편집하겠습니다. 이 일과 저는 별개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어휘를 끼워 넣지 않겠습니다.” 리 형제님이 제게 아주 분명하게 요구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전 세계의 성도들이 메시지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사용되는 어휘가 중학교 1학년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업 중에 구약의 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신 25:4). 이 말씀의 내용은 소가 곡식을 밟아 떨어내는 동안 소에게 주둥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을 사역하는 이와 교회에서 인도하는 형제들에게 적용했습니다(고전 9:9-10). 저는 기꺼이 소가 되고 제가 수고하는 모든 것을 조금씩 뜯어먹겠다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제게는 주둥망이 씌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