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 우리의 유일한 길

우리는 잠자리에 들 때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낮 동안에 무엇을 했고 무엇이 발생했건 간에 십자가가 모든 것을 처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후에 당신이 부인이나 남편 때문에 좀 불쾌했다 하자. 잠자리에 들 때 십자가를 불편한 감정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불쾌한 감정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길은 십자가이며 금욕주의나 자기 학대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의 인식을 갖고 잠들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깨달음을 갖고 눕는다면 다음날 아침에는 부활 안에서 새사람으로 깨어날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에 대비되는 유일한 인격인 그리스도가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 대비되는 유일한 길인 십자가가 있다.

거리에서 차를 모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생각나게 해 줄 수 있다. 차를 몰 때 많은 교차로에 이른다. 모든 교차로가 십자라는 것을 깨달았는가? 이 십자로 중 어떤 것은 크고 또 어떤 것은 작지만 모두 십자로이다. 많은 십자로를 통과함으로써만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 영적 경험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도 새 예루살렘에 이를 때까지 많은 십자로를 통과해야 한다. 교차로를 가로지르지 않고서는 지리적으로 멀리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전진할 수 없다. 새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 비로소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 그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모든 소극적인 것이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는 주님과의 동행 안에서 매일매일 십자가를 통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골로새서 라이프 스타디, 26장, 245쪽)

우리에게 필요한 교사

제사장은 주님과 연합되고, 주님으로 적셔지고, 주님을 먹고, 하루 종일 주님을 호흡하는 사람이다. 그가 말하는 것마다 바로 주님 자신이다. 이것이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교사들에게 있어야 할 바로 그것이다.

에스라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금식을 공포했고 자신도 금식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주님과 접촉함으로써 단순하게 주님과 하나였다. 그는 의문에 속한 율법학자가 아니라, 제사장에 속한 율법학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일정 분량의 지식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아는 것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지만, 그들 자신은 그 가르침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은 이런 교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에스라, 곧 제사장에 속한 율법학자, 제사장에 속한 교사가 필요하다.

이런 사람은 즉각적이고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으로 적셔져 하나님과 하나 되는 교사이다. 에스라는 아주 깊이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에게 군대를 청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을 보호하게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었다. 이러한 사람이 주님의 회복 안에서 교사가 될 자격이 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필요하다. 즉 그 가르침과 연합된 제사장 직분이 필요하다. 우리는 에스라와 같이 제사장에 속한 율법학자들이 필요하다. 지식에 불과한 것은 건축하지 못하고 오히려 죽인다. 건축하는 것은 바로 제사장에 속한 교사이다.

에스라들, 즉 하나님과 하나이고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에 능숙한 사람들이 수많은 귀환한 포로들을 이끌어 오고, 더욱 많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주님의 회복 안으로 가져오는 데에 적합한 사람들이다. (위트니스 리 전집, 1969년, 2권,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성의 회복, 7장, 558-559쪽)